국가 권력과 민간 자본의 거대 프로젝트 - 워커힐 건설과 박흥식의 남서울계획을 중심으로 -

I. 서론: 군사정권의 등장과 거대 도시 프로젝트의 태동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경제 개발과 조국 근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까지의 서울 도시계획이 파괴된 도심의 뼈대를 복구하는 '전재복구' 수준에 머물렀다면, 1960년대 초반 군사정권의 등장과 함께 서울의 공간 구상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규모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당시 국가 권력은 막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했으며, 여기에 특정 목적을 가진 민간 자본이 결탁하면서 서울 외곽 지역을 무대로 한 거대 프로젝트들이 잉태되었다.

본 소논문에서는 1960년대 초 군사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 두 개의 거대 프로젝트를 조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외화 획득이라는 명분 아래 군사 작전처럼 밀어붙인 동부 서울의 '워커힐(Walkerhill) 건설'이며, 둘째는 일제강점기 거물 기업가였던 박흥식이 한강 이남의 광활한 영토에 구상했던 '남서울계획'이다. 이 두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과 실패 혹은 변질의 역사를 통해, 초기 개발독재 시대의 도시계획이 지녔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유착 관계를 분석해 본다.

II. 외화 획득의 명분과 정치자금의 온상: 워커힐 건설

1. 워커힐의 탄생 배경과 김수근의 등장 워커힐 건설은 5.16 군사쿠데타의 핵심 주역이었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착상에서 비롯되었다. 1961년 7월경, 김종필은 주한미군 사령관 멜로이 대장과의 대화에서 주한미군 장병 약 3만 명이 위로휴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막대한 달러를 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들이 일본에서 탕진하는 외화를 국내로 흡수하기 위해, 서울 근교에 미군이 만족할 만한 대규모 위락시설을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입지 조사 끝에 한강과 광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의 19만 1,520평 부지가 선정되었다. 호텔의 이름은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다 교통사고로 순직한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이름을 따 '워커힐'로 명명하여 미군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 거대한 위락시설의 설계를 맡은 인물은 당시 일본에서 귀국하여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30대 초반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김수근은 강명구, 김희춘, 나상진, 엄덕문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 5명을 초청하여 공동 설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지형과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는 파격적인 설계를 선보였다. 특히 김수근이 직접 설계한 힐탑과 더글라스 하우스 등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2. 4대 의혹사건과 무리한 공사 강행 워커힐 건설은 1962년 1월 5일 기공식을 거쳐 1월 23일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으나, 그 추진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온갖 불법과 편법이 난무했다. 당초 60억 환이라는 자금의 출처조차 불분명했던 이 공사는, 1961년 9월부터 각 군 공병감 휘하의 군 장비 4,158대와 연인원 2만 4,078명의 군 병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등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다.

또한, 공사 자금이 부족해지자 산업은행에 무제한 융자를 강요하였고, 이것이 국제 문제로 비화되어 대출이 거부되자 교통부와 관광공사로 하여금 주식대금 명목으로 5억 3,950만 원을 빼돌려 사용하게 하는 등 횡령과 착복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성된 막대한 자금은 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 조직 및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을 샀으며, 결국 이는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빠찡꼬) 사건과 함께 군사정권의 '4대 의혹사건'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3. 처참한 운영 실패와 재벌への 특혜 매각 숱한 의혹과 무리수 속에서 1962년 12월 26일 준공된 워커힐은 1963년 4월 정식 개관했으나, 당초의 목적인 미군 휴가객 유치에는 철저히 실패하고 만다. 연간 17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겠다던 김종필의 호언장담과 달리, 정작 미군들은 워커힐을 외면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미군 가족들의 강력한 반발과 더불어, 값싼 술집과 유흥을 즐길 수 있었던 일본과 달리 워커힐은 숙박비와 술값이 너무 비쌌고, 무엇보다 미군들이 원했던 윤락 여성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아직 강변도로나 천호대로가 개설되기 전이어서 도심부에서 워커힐로 접근하는 교통편이 최악이었다는 점도 뼈아픈 패착이었다.

그 결과 워커힐의 객실 회전율은 31%에 불과했고, 1963년 한 해에만 5,619만 원의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영 상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적자 행진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고, 결국 정부(관광공사)는 1973년 3월, 이 거대한 시설과 땅을 민간에 불하하기로 결정한다. 공매 입찰이라는 형식을 빌렸으나 사전에 선경개발(현재의 SK그룹)이 낙찰자로 내정되어 있었고, 건물과 시설은 고사하고 땅값만 쳐도 평당 1만 4,000원이 채 안 되는 26억 3,200만 원이라는 헐값에 매각되었다. 국가 권력이 불법적으로 조성한 거대 시설이 결국 재벌의 손에 헐값으로 넘어가며 특혜로 귀결된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III. 시대를 앞서간 거대 신도시 구상: 박흥식의 남서울계획

1. 부정축재자의 구명과 원대한 전원도시 구상 워커힐 건설이 서울의 동쪽 변두리에서 권력형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을 무렵, 한강 이남의 광활한 지역에서는 민간 자본에 의한 세계적 규모의 신도시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그 주역은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여 조선 최고의 거부로 불렸던 박흥식이었다. 5.16 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던 박흥식은 재산 헌납을 서약하고 43일 만에 풀려났는데, 이때 군사정권은 그에게 '수도 서울의 인구 증가에 대비한 주택 건설 계획을 민간 입장에서 구상하라'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이에 박흥식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과 신동면, 광주군 언주면 및 중대면 일대(오늘날의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과천시 일대)의 2,400만 평을 포괄하는 거대한 '남서울계획안'을 수립하여 정부에 제출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30배에 달하는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 중 개발 가능한 1,110만 평을 일괄 매수하여 1가구당 90평의 쾌적한 주택을 짓고, 32만 명에서 최대 48만 명을 수용하는 '자족적 전원도시'를 조성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이러한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박흥식은 인구 배분과 토지 이용까지 세밀하게 계획했다. 정부의 입법·사법·행정부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 배치하고, 상업 지역, 공원, 녹지 등을 체계적으로 배분하는 등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울 만큼 거시적인 도시계획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2. 일본 기업과의 구상무역을 통한 외자 조달 계획 총사업비 270억 원(당시 약 1억 달러)이 소요되는 이 막대한 프로젝트를 위해 박흥식은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일본의 거대 자본을 끌어들인다. 그는 미쓰이 물산 등 일본 4개 기업으로 구성된 '대한 도시계획 교역회사단'과 장기 구상무역(求償貿易) 협정을 체결했다. 매년 1,000만 달러씩 10년간 총 1억 달러 규모의 건설 자재(시멘트, 철근, 기계류 등)를 일본에서 차관 형식으로 들여오고, 그 대금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생우, 무연탄, 김 등을 일본에 수출하여 상환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80여 달러에 불과했던 절대 빈곤의 시대에 1억 달러 규모의 외자 유치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제안이었다. 1963년 초까지만 해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군사정권 수뇌부는 이 계획에 큰 매력을 느꼈고, 관계 장관들을 움직여 내인가서와 권한부여증명서를 교부하는 등 사업 추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듯했다.

IV. 남서울계획의 현실적 한계와 좌절

1. 치명적인 결함: 교통 대책의 부재와 비현실성 박흥식의 원대한 남서울계획은 그러나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도시(母都市)인 서울 강북 도심과의 연결 교통수단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강남에 30~40만 명의 거대 신도시를 만들겠다고 하면서도, 한강을 건널 새로운 교량이나 지하철 등 광역 교통망에 대한 청사진이 빠져 있었다. 당시 한강 다리라고는 한강인도교와 광진교뿐이었고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겨우 건설 중이던 상황에서, 교통 대책 없는 강남 개발은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또한, 1960년대 초의 빈약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1,100만 평에 달하는 방대한 사유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있는 법적, 행정적 권한이 민간 기업인 '흥한도시관광(주)'에게 주어질 수 없었다. 토지 소유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도시계획법 시행령의 벽을 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2. 국가 권력의 변심과 제3한강교 건설로 인한 무산 결국 군사정권은 사업의 현실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민간 기업의 차관 도입에 대해 국가가 지불 보증을 서주는 것은 특혜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일본과의 구상무역 역시 국가 수출 계획과 상충한다는 관료들의 반대가 거셌다. 1964년 하반기에 이르러 중앙도시계획위원회와 건설부는 이 사업의 독자성을 인정할 수 없으며, 정부 지불 보증 불가라는 방침을 확정 지었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1965년 서울시의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 건설 추진이었다. 서울시가 강남과 강북을 잇는 제3한강교를 건설하겠다고 나서자, 교량이 착공되면 강남 일대의 땅값이 폭등하여 박흥식이 계획했던 대상 토지의 일괄 매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흥식은 서울시에 제3한강교 가설을 억제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서울시(당시 윤치영 시장)는 박흥식의 계획은 미확정된 내인가에 불과하다며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국 4년간의 동분서주에도 불구하고 남서울계획은 1965년 말 중앙정부의 최종 불허 방침과 함께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V. 결론: 개발독재 시대 도시계획의 빛과 그림자

1960년대 초 군사정권 치하에서 기획된 워커힐 건설과 박흥식의 남서울계획은 극명하게 엇갈린 운명을 맞이했다. 워커힐은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추진력과 불법적인 자금 및 인력 동원을 통해 단기간에 거대한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으나, 치밀한 시장 조사와 경제성 검토가 결여된 탓에 처참한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다 재벌에게 넘어가는 수순을 밟았다. 반면 남서울계획은 민간 자본과 일본의 상업 차관을 바탕으로 강남 일대의 마스터플랜을 그렸다는 점에서 선구적이었으나, 인프라 확충에 대한 국가의 뒷받침을 얻지 못하고 권력의 이해관계에 밀려 도상 계획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두 프로젝트는 1960년대 한국 도시계획의 과도기적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도시 공간의 창출이 면밀한 사회적 합의나 과학적인 수요 예측보다는, 정치 권력의 자의적인 판단이나 특정 자본의 이권 논리에 의해 좌우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맹목적이고 파격적인 구상들은 한국 사회가 '만원 서울'의 한계를 벗어나 한강의 기적과 강남 개발이라는 거대한 공간적 폭발을 향해 나아가는 거칠지만 강력한 서곡이 되었다. 국가와 자본이 얽혀 만들어낸 이 시대의 파행적 프로젝트들은 훗날 수백만 평 단위로 뻗어나갈 영동·잠실 지구 구획정리사업과 강남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중대한 역사적 전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