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가 된 수도와 전재복구의 한계 - 한국전쟁기 서울의 파괴와 1952년 전재부흥계획을 중심으로 -

I. 서론: 일제의 유산과 잿더미가 된 수도

현대 서울의 도시 공간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물리적 파괴와 처절한 전재복구의 과정 속에서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1965년을 목표 연도로 잡고 계획 인구를 110만 명으로 추산하여 '경성부 시가지 계획'을 수립한 바 있으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제대로 이룩해 놓은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떠날 때까지 도심부 여러 곳에는 적의 폭격기가 내습하여 발생할 화재 연소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소개도로'라는 것만 흉하게 개설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미완의 도시 서울은 겨우 70~80만 명 정도가 거주하기에 적당한 공간에 불과했으며,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례 없는 참화를 겪으며 완전히 잿더미로 변모하게 된다.

II. 전쟁의 참화: 초토화된 시가지와 용산 대폭격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서울의 물리적 기반을 철저하게 붕괴시킨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전쟁 발발 직전 서울의 인구는 170만 명 정도였고 주택은 약 19만 동에 달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3만 5천 동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절반가량이 불에 타 개축하지 않으면 거주할 수 없는 집도 2만 동이 넘었다. 공공건물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여 서울역 내부가 완전히 불타버렸고 용산역, 청량리역 등은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48개의 교량이 파괴되어 교통이 마비되었다.

특히 서울의 하드웨어를 결정적으로 파괴한 사건 중 하나는 미군 B-29 대형 폭격기 50기 이상이 동원된 '용산 대폭격'이었다. 1950년 7월 16일 오후에 감행된 이 폭격은 용산 철도시설과 병기창 일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미군이 용산 일대에 대폭격을 가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인민군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공장을 점령하여 조선은행권을 무단으로 찍어내며 남한 경제를 교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인쇄 시설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이 폭격으로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며 도시는 참혹한 폐허가 되었다.

III. 전화 속의 기적: 500년 고도의 문화재 보존 노력

이러한 무차별적인 융단 폭격 속에서도 서울의 유서 깊은 문화재와 사적을 지켜내기 위한 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하자, 미 공군은 서울 수복 작전에 앞서 시내의 북한군 진지에 대해 전략적 대폭격을 가하여 서울 시내 모든 것을 완전 파괴, 소각하는 전법을 구사하려 했다.

이 위기의 순간, 당시 주일대표부 공사였던 김용주는 미 공군의 전면 폭격으로 귀중한 고유문화재와 사적들이 모조리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긴급히 찾아갔다. 그는 "우리 한국은 장구한 역사와 고유문화를 가진 나라이며, 이번 폭격으로 문화재마저 완전히 소멸될 우려가 있다"며 서울 폭격 계획의 철회를 간곡히 호소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 호소에 수긍하였고, 참모장에게 서울 지도를 펴놓고 파괴해서는 안 될 지점을 표시하도록 지시했다. 김용주 공사는 덕수궁, 경복궁, 창경궁, 남대문, 동대문 등 주요 지점에 붉은 칠을 하다가, 정동을 기점으로 남대문을 거쳐 퇴계로에 이르는 반월형의 선을 긋고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다시 범위를 좁혀 정동에서 을지로, 왕십리에 이르는 선을 그었고, 힉키 참모장이 남대문 등의 지점에 굵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특별 배려를 약속받게 되었다. 그 결과, 종로 거리 이북 지역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피할 수 있었으며, 남대문과 덕수궁 등 귀중한 사적들이 전화(戰禍)를 모면하는 기적을 낳았다.

IV. 재정 0원의 현실과 이상적 전재복구의 충돌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후, 잿더미가 된 서울을 재건하는 과정은 이상적인 복구론과 처참한 예산 부족이라는 극명한 충돌을 겪는다.

일부 시민들은 1666년 런던 대화재나 1923년 도쿄 관동대진재 당시처럼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여 이상적인 원대한 현대 도시계획을 세워 서울을 재건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당시의 척박한 현실은 전면적인 토지 매수와 마스터플랜 적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3년 기준 한국인 1인당 GNP는 겨우 67달러에 불과한 절대 빈곤 상태였다. 1951년 서울시의 일반회계 예산은 세 차례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고도 53억 2,000만 원이었고, 결산액은 경상부와 임시부를 합쳐 겨우 29억 1,888만 원(당시 환율로 약 24만~48만 달러)에 불과했다.

게다가 세입 결산액 중 54.5%가 금융기관에서 빌린 빚과 국고보조금 등 의존 재원이었으니, 정상적인 도시계획을 위한 자체 자금은 전무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부가 막대한 예산으로 민간 재산을 일괄 매수하여 넓은 도로와 공원을 조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V. 초대 도시계획과장 장훈의 고군분투와 토지구획정리사업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전재복구계획의 실무를 총괄하며 현대 서울의 골격을 그려낸 인물은 광복 후 만 11년간 도시계획과장 자리를 지킨 장훈(張勳)이었다. 그는 매일 밤 야근의 연속이었고 집에서 잠을 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도면을 그리며 계획을 수립하는 데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재정 뒷받침이 전혀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수법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이었다. 예산으로 토지를 살 수 없으므로, 파괴된 지역의 토지 소유자들에게서 땅을 떼어내 도로와 공공용지를 확보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1952년 3월 25일, 마침내 내무부 고시 제23호로 '서울도시계획 가로변경·토지구획정리지구 추가 및 계획지역·변경'이라는 최초의 전재부흥계획이 공식 발표되었다. 이 계획을 통해 광화문네거리에서 중앙청 앞까지의 도로 폭을 53m에서 100m로 넓히고, 종로 5가에서 장충동까지 도로를 40m로 확장하는 등 현대 서울 도심 가로망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1936년 21개에 불과했던 광장을 32개로 늘려 광화문네거리(70,700m²)와 서울역전(64,690m²) 같은 대형 교통 결절점들도 이때 계획되었다.

특히 1952년에 인가된 제1·2 중앙토지구획정리사업은 충무로, 을지로 일대의 꼬불꼬불했던 1.5~2m 뒷골목을 4m로 통일하고, 간선도로를 8m 폭으로 일제히 확장하는 과감한 조치였다. 이 사업의 비용은 당시 180대 1 환율로 계산해도 13만 9,500달러(2,511만 환)에 불과한 빈약한 예산이었으나, 제1지구에서 31.66%, 제2지구에서 31.8%라는 엄청난 도로율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도시계획을 빙자한 서울시의 횡포다"라는 거센 민원과 반발 속에서도 끝까지 사업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나아가 1953년 8월 3일 공포된 '건축행정요강'을 통해 세종로, 남대문로 등 주요 간선도로에 면한 건축물을 내화 구조의 3층 이상으로 짓도록 규제하여 도심의 고층화와 근대화를 유도하기도 했다.

VI. 결론: 한계 속에서 잉태된 거대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골격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 전재복구계획은 인프라가 붕괴된 잿더미 위에서,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라는 극한의 경제적 빈곤 속에 잉태된 처절한 생존과 재건의 기록이다.

김용주 공사의 헌신적인 호소 덕분에 종로 이북의 핵심 문화재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전후 복구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는 국가 재정의 완전한 고갈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했다.

결국 서울시와 장훈 도시계획과장은 '토지구획정리'라는 차선책을 통해 사유지를 깎아내며 도심부의 기본적인 가로망을 힘겹게 확보해야만 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땅이 도로에 편입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강력한 민원에 부딪혀 뼈아픈 타협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2년의 전재부흥계획은 오늘날 서울 도심 교통망의 뼈대가 된 세종로, 태평양로, 을지로, 퇴계로 등 넓은 가로와 대형 광장들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예산 0원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도로와 광장의 여유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던 기획자들의 분투가 있었기에, 이후 국가 주도의 본격적인 거대 개발이 뻗어나갈 수 있는 물리적 바탕이 마련될 수 있었다.

비록 철저한 자본 부족이라는 태생적 제약을 안고 있었지만, 이 전재복구 과정은 폐허를 딛고 현대 거대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골격을 짜 올린 위대한 첫걸음이었다.